⑨ KFM 경기방송 특별기획 "실미도는 끝나지 않았다"

  • 입력 : 2019-05-21 14:49
  • 수정 : 2019-05-29 09:03
  • 실미도 9부.mp3
프로그램 단독 공개 주요 내용
국가 2급 비밀 실미도 사형수 군사재판기록
미국 1급 기밀 키신저-주은래 비공개회담
실미도 기간병-유가족 트라우마 분석

9화 - "사라진 사람들"

[kfm 경기방송= 오인환, 서승택 기자]

과거 정부는 전사자들에 대한 유해발굴만 한정적으로 진행해왔다.

반면 국가폭력이나 학살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상황은 달랐다.

그나마 2007년 이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조사를 통해 1천6백여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도대체 왜 유해가 전달이 안됐는지, 가족들에게 통보조차 안 했는지, 왜 그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실미도 사건을 처음으로 고발했었던 예비역 장성 출신의 국회의원은 왜 죽도록 고문당했고, 고문으로 인해 일찍 돌아가셨어요."

실미도 역시 그러했다.

실미도 공작원 20명은 36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았고 그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국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살아진 공작원 4명은 과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실미도 공작원 유가족 [임성빈, 김병염 유가족] (인터뷰) "이름도 애기했습니다만 끝까지 얘기 안 하시더라고요. 그 당시에 제가 법적인 권한이 있다면 이 분을 체포해서 어디를 끌고 가서라도 입을 열게 하고 싶었어요." "엄청 울었어요 우리가, 벽제에 가서도 몇날 며칠을 구덩이 속에서 잠자고 그렇게 했는데도 결국 못찾았잖아요." "지속적으로 매장지에 대한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명예회복이 안 된다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아요."

KFM 경기방송 특별기획 10부작. "실미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9화 "사라진 사람들"

나레이션: 강신일

안녕하십니까? 영화 실미도, 684부대 제2조장 역을 맡았던 배우 강신일입니다.

우리는 지난달 실미도 부대원들이 모셔져있는 봉안소를 찾았습니다.

아직까지 시신 조차 찾지 못한 공작원 유가족들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공작원 유가족 (인터뷰) "해마다 속상해서 아버지 술 잡수시고, 엄마는 자꾸 점보러 다니고, 싸리문 열어놓고, 밥 항상 아랫목에 오빠 밥을 묻어놓고 따뜻하게... 평생을 하얀 머리 끈을 조여매고 사셨어요 우리 엄마가..."

국방부는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종료 이후 그들에 대한 예를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조소영 국방부 서기관 (인터뷰) "다만 사형집행된 4분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고 지속적으로 매장지에 대한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유해 매장지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국방부로 꼭 제보 부탁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46년 만에 영면에 들어간 공작원들을 만나봅니다.

사건 당일 그 현장에 있었던 기간병 이준영 씨는 그날을 어떻게 회상할까요?

이준영 사무국장 (인터뷰) "부대장이 날 부르더라고, 작전과장하고... 네가 계급장 떼고 총 하나 차고 병원으로 가라 양동수가 목에 총 맞고 사경을 헤메고 있으니까..."

기간병 이준영 씨는 동기 양동수 씨와 함께 이 곳에서 공작원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준영 사무국장 (인터뷰) "깜짝 놀라는 거지. 나를 보고 양동수를 봤으니까. 나도 겁먹었고. 병원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놈들이 있더라고. 가보니까 정신과 병동에 4명이 사지가 다 침대에 묶여서 있더라고. 그때 김창구하고 임성빈이하고 이서천하고 이런 애들이 있는데..."

분명 사건 당시 4명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안’을 이유로 국가에 의해 감금됐고, 이듬해인 1972년 3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취재진이 단독으로 입수한 군사재판기록은 실미도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유가족은 이 기록을 입수하기 위해 국가와 기나긴 싸움을 해야만했습니다.

취재진은 1971년 9월 작성된 공작원 사형수의 기록을 지난 2월에서야 문서로 받아들었습니다.

문서 상단에는 2급 비밀, 그리고 영어로 SECRET이라고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 4명 모두의 죄명은 '초병살해 등' 그리고 신분은 민간인입니다.

어째서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게 된 걸까요?

속전속결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당시 재판은 짜여진 듯이 신속하게 끝이 났습니다.

1971년 8월 24일 구속된 이들의 신문은 1981년 9월 13일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이런 질문들이 오고 갔는데요.

공작원 사형수 임성빈이 자필로 써 내려간 신문서의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나레이션]

재판장 : 피의자의 소속 주소, 계급 주소, 군변, 연령, 성명, 호주성명 및 관계를 말하시오.

임성빈 : 소속은 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 계급은 미발급, 군번은 7319455입니다.

재판장 : 피의자는 같은 피교육자등과 함께 기간요원등을 살해하고 서울시내에 진입하여 군.경.민 등을 살해하는 등 난동을 자행한 사실이 있는가요?

임성빈 :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재판장 : 피의자들은 어찌하여 위와 같은 무모한 난동을 일으키려고 하였는가요?

임성빈 : 원래 저희 유격 훈련원이 훈련을 받기 전 입대조건은 6개월 교육이었습니다.

신분 보장도 없었고, 혹독한 기합과 훈련만 이어졌습니다.

이는 국가가 결국 우리를 배신했다는 불편감으로 누적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억울한 사정을 높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시정하려는 생각에서 다른 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실미도를 탈출하게 된 것입니다.

실미도 탈출 이후 서울로 향하던 과정에 대해 신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조사 신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8월 21일 오후 A조 내무반에 모여 난동거사에 대한 세부계획을 짜고 22일 아침에 각 조원들과 범행을 모의했다고 합니다.

또 당시 군인들을 죽이지는 말고 감금시켜 놓고 탈출하는 것이 어떻냐는 논의도 있었냐는 증언도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됐죠.

실미도 사건이 벌어진 그날,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30분을 공격개시 시간으로 정하고 그보다 10분 앞선 8시.

장성관 공작원이 교육대장실에서 훔쳐온 실탄으로 공포를 발사하면서 습격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2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18명의 기간병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게 됩니다.

[나레이션]

재판장 : 이상의 진술은 사실과 다름없는 임의의 진술인가요?

임성빈 : 예, 사실과 다름 없습니다.

신문은 다음날인 14일에도 이어졌습니다.

다음 날에도 실미도 탈출 이후 서울로 향하던 과정에 대해 신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나레이션]

재판장 : 피의자 등은 영등포 유한양행 앞에서 폭사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 때의 상황을 상술하시오.

임성빈 : 우리의 목적달성이 여의치 않을 때는 자폭하기로 완전 합의가 되었습니다.

유한양행 앞에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C조 조장 정기순이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니 남의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스스로 자폭하자고 지시한 겁니다.

옆에 있던 장성관이 그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재판장: 피의자 등이 민간인을 보호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민간인을 하차시키고, 동 버스를 운전할 것이지 합승하고, 접전하거나 수류탄으로 폭사를 기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임성빈: 물론 그러한 위험한 상태에서 민간인들의 생명에 위해가 오리라는 것을 인식 못한 것은 아니나 뒤에서 우리 버스를 추격해 오는 것으로 착각해 그들을 하차시킬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민간인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그대로 수류탄을 터트린 것입니다.

재판장: 그렇다면 피의자들은 인천에서 서울로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한번도 먼저 공격적으로 총을 발사하거나 민간인을 살해할 의사가 없었다는 말인가?

임성빈 : 저희가 먼저 공격적으로 군인이나 경찰을 살해할 의사가 있었다면 처음 송도고개에서 이미 그 군인들을 살해할 수 있었으며 민간을 죽일 의사가 있었다면 처음 탄 버스 운전수가 중도에서 뛰어내릴 때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요컨대 저희 동료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저쪽에서 먼저 총을 쏴 그에 대응했거나 상황이 급박해서 민간인들을 하차시키지 못한 것 뿐입니다.

이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실미도를 탈출하기 위해 비록 기간병들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인명피해는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추가 조사가 필요했던 공군은 1971년 9월 18일 이들의 구속기간을 연장합니다.

[나레이션]

1971년 9월 29일까지 피의자에 대한 구속기간의 연장을 허가한다.

이후 검찰관의 신청은 수사를 계속함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된다.

적용법조 : 군법회의 법 제243

1971년 9월 18일 공군본무 보통군법회의 관할관 공군 중장 옥만호

이어서 1971년 9월 29일 공소장이 제기되고 10월 15일 재판관이 지정되는데요.

당시 지정된 재판장은 공군대령 김경태 심판관은 공군대령 정진태, 공군대령 이창수, 공군중령 김원기, 그리고 법무사는 공군 중위 동상홍. 관할관은 공군대장 옥만호였습니다.

그리고 생존자 4명에게는 10월 18일, 여운성 공군대위가 국선변호인으로 배정됩니다.

공작원들을 풀어줄 마음이 없었던 공군은 9월 29일까지 연장시켰던 구속 기간을 10월 25일로 추가 연장합니다.

그리고 11월 5일 오전 9시 1차 공판, 이어 12월 6일 오전 9시 30분에 2차 공판이 열리게 되는데 결국 이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됩니다.

[나레이션]

재판장은 피고인 임성빈, 같은 이서천, 같은 김병염, 같은 김창구에 대하여 각각 판결서에 의하여 판결의 주문을 낭독하고 이유의 요지를 설명한 후 이 판결에 대하여 불복이 있을 때에는 관할관의 확인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 고등군법회의에 항소할 수 있는 지를 고지하고 이 군법회의 폐정을 선언한다. 주문 피고인 전원을 사형에 처한다. 1971.12.6.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12월 8일 확인서가 작성되고 12월 14일 소송기록이 공군 고등 군법회의로 송부됩니다.

그리고 15일 국선변호인으로 배정된 공군대위 홍용표, 16일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만 이는 17일인 바로 다음날 기각되고 맙니다.

[나레이션]

1. 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결심과 각오로 입대하여 훈련을 받던 피고인들이 그네들의 단순한 대우불만을 해소하려는 지극히 사소하고 치졸한 동기에서 이번 범행이 이루어진점.

1. 피고인들이 눈앞의 처우개선을 위한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수호에 앞장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비 근무에 충실한 수많은 우리의 전우들을 무차별 학살한 그 잔인무도하고 매몰한 비인간적인 행위는 어떤 이유로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1. 피고인들이 온갖 고통과 시련을 참으면서 수년간 기량과 실력을 닦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피고인들의 일신상의 욕구해소를 위하여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에게 무자비하게 총부리를 돌려댄 비겁하기 이를데없는 그 배신자들에게 조국은 결코 관용만을 베풀 수 없다.

1. 피고인들의 이 엄청난 난동은 국내적으론 물론 국제적으로 조국의 명예를 여지없이 실추시킨 결과를 초래하여 국가 위신을 손상케 한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들에 원심 형량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사료되므로 변호인의 항소 이유 논지는 이유없다.

공군고등군법회의 검찰부 김중권

이렇게 12월 21일 국법회의는 폐정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2년 3월 7일. 이들의 사형 집행을 명하는 명령서가 전달됩니다.

집행 일시는 1972년 3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집행 장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동소재 공군 제7069부대 후편.

이렇게 실미도를 증언해야할 이들이 전원 사형됐습니다.

공작원 유가족 (인터뷰) "공개적으로 살아있다고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몰랐지, 국방부 TF에서 조사해서 그 당시에 알았지." "유해발굴 하는데 가서 5남매가 다 갔어요. 그때 진짜 시체를 찾는다는 기대감에 엄청 울었어요. 벽제에서도 몇날 며칠을 자고, 국방부에 여자분 있잖아요. 그 분이 찾아준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 밤 자면 아침 일찍 귀가하고... 지금도 못 찾았잖아요."

과연 지금 그들은 어디 있는 걸까요?

2005년 당시 과거사위에 참여했었던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이었던 안정애씨는 4명의 훈련병이 지금 어디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안정애 과장[당시 국방부 조사위원회 활동] (인터뷰) "그 당시 알고 있을법한 사람들을 일일이 전화도 하고, 찾아가기도 하고 했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끝까지 얘기를 안 하시더라고요."

안정애씨가 주장하는 대로 정말 매장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요? 대체 이들은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요?

현재 경기도 벽제에 위치한 군 제7지구 봉안소엔 이들 4명의 가운데 유족이 위패 봉안을 동의한 김창구와 이서천의 위패만 모셔져 있습니다.

김병염, 임성빈 유족은 위패 봉안에 반대했고 그래서 이들은 현재 위패는 물론 유골함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봉안소엔 공작원 20명 유골함과 사형수 2명의 위패만 모셔져 있는 셈인 거죠.

공작원 유가족 (인터뷰) "오빠가 지금 억울하잖아요. 오빠가 억울해하니까 명예회복을 해야 하고, 저희 가족도 명예회복이 안 되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유해도 찾으면 금상첨화인데 1등은 명예회복이고, 찾아줄 수 있으면 찾아주는 것 그런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가 대통령께 바라는 것은 존경하기 때문에 뽑았어요. 과거사 청산과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대통령께서 약속을 하셨어요. 약속을 하셨지만 아직도 발의가 안 된 상태에요. 약속대로 청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군사재판기록을 통해 실미도 사건이 우발적이었으며, 공작원 역시 그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생각 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과연 공작원 누군가가 기간병 누구를 어떻게 살해했는지도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인데요.

다만 공작원 4명은 그들이 속해있던 그룹을 대신해 그들의 죄를 공동으로 책임져야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끝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긴채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나레이션]

조국에 헌신하고 희생하겠다는 큰 뜻 아래 굳은 결의와 각와 인내로 수년간 절차탁마하였습니다.

비굴한 인간으로써의 목숨은 이미 초개와 같이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러면서도 피고인들은 단 한번만이라도 조국을 위해서 신명을 바칠 기회와 임무가 부여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조국은 어느 기회인가 이와 같은 청년들의 위대한 희생을 다시금 필요로 할 경우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디엔가 묻혀 있을 실미도 공작원 4명의 귀환을 꿈꿔봅니다.

실미도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실미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종회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기획·연출 오인환 취재 서승택 작가 하나리 나레이션에 강신일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19년도 방송문화진흥회의 라디오콘텐츠제작지원을 받아 제작하였습니다.

◎ 본 프로그램은 유튜브를 통해 감독판을 청취하실수 있습니다.

[kfm 경기방송 오인환, 서승택 기자]

기획: 오인환 취재: 서승택 작가: 하나리
나레이션: 강신일
성우: 홍후백, 하지형, 김용, 박주광, 이다슬

도움주신분들
실미도 기간장병
양동수, 김태수, 안지근, 김정현, 이준영, 김동배, 김양구, 김이태, 성영균, 권오관

공작원 유가족
이향순, 김병희, 임충빈, 임일빈, 백영철

김신조 목사
이찬진 변호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조소영 국방부 서기관
이만종 호원대학교 교수
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원회 의장
박승준 최종현 학술원 자문위원
김태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사범대학장
신동근 원장(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안정애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1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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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