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M스페셜] "한반도의 봄...세상에서 가장 먼 나의 가족" /KFM경기방송

  • 입력 : 2018-09-06 18:11
  • 수정 : 2018-09-10 08:04
지난 8월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온통 울음바다였습니다. 현재 살아계신 이산가족 수는 5만 7천여명. 이중 매해 3천명이 넘는 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계시다고 하는데요. 경기방송 21주년 특별기획, KFM스페셜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방송일시: 2018년 9월 6일(목)
■방송시간: 3부 저녁 7:00 ~
■진 행: 소영선 프로듀서
■기획, 연출, 취재 : 오인환 보도국 기자 / 장주영 프로듀서

20180906(목) kfm스페셜 세상에서 가장 먼 나의 가족

올해 봄, 따뜻한 바람이 한반도에 불어왔습니다.

(인터뷰1) 문재인, 김정은 4.27 남북정상회담 (녹취)"“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함께 선언하였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시작될 것이며 고향을 방문하고 서신을 교환할 것입니다. 오늘 손을 맞잡기까지 너무도 긴 시간이 흘렀고, 우리 모두는 너무 오랫동안 이 만남을 한마음으로 기다려왔습니다.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은 2년 6개월 동안 중단되었던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기로 약속합니다.

떠날 이, 흩을 산, 집 가, 겨레 족 : 합쳐 이산가족

2018년 현재까지 살아있는 이산가족 수는 5만 6,862명.

매해 평균 3600명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이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저희는 68년이라는 세월동안 77살이 된 9살짜리 소년을. 82살의 할머니가 된 14살짜리 소녀를 만나보았습니다,

경기방송 21주년 특별기획 “한반도의 봄” 1부 - “세상에서 가장 먼 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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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 ‘뭐 한 일주일정도 되면은 다시 원상복귀가 되니까 잠시 피했다가 와라 ‘다 큰 처녀들은 다 버린대. 그래서 잠깐 원산으로 피난하라고 그랬어요. 거기까지 잠깐 피난하라고 그래서 잠깐 피한다는 것이...‘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어머니 금방 다시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그렇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동무와 뛰어놀던 집 앞 작은 언덕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갈 수가 없습니다.

전쟁.

전쟁을 겪은 세대는 참혹했던 그 시절을 자식들에게 얘기하기조차 꺼려합니다.

(인터뷰3) “전쟁을 좀 겪은 사람이고, 전쟁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전쟁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제가 전쟁을 여러 번 겪은 사람이예요. 왜정시대 겪었죠. 6.25겪었죠. 겨울날 겪었죠. 진짜 나는 무서운 날을 겪어서요. 이 땅에 전쟁 발 못붙이도록 끊어야 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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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맺어진 휴전협정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둘로 갈라졌습니다. 금방이라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피난민들은 그 후로 가족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남북 이산가족 총 수는 13만 1531명.

그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이산가족 수는 5만 6,862명

더욱이 생존자 82.6%가 70살 이상의 노인이 된 지금, 이산가족의 문제는 더 이상 끌 수 없는 우리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경기도 과천에서 상봉대상자로 선정된 80살 김광호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로썬 68년 만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게 된 건데요.

(인터뷰 4) 거기에 확인된 것은 동생부부라고 되어있어요. 난 지금 동생을 만나는 것도,. 동생이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래 살아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고, 앞으로 오래 살아서 두 번 세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김광호씨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의 한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피난길에서 흥남에 다다른 김 씨 가족.

막다른 길 흥남항에서 유일하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가족이 함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10일 부터 24일까지 진행된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배, 상선 매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호에 그들은 몸을 싣게 되었는데요. 당시 배에는 무려 1만4천여명이 탑승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비규환의 흥남부두.

소설 흥남부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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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먼저 타려고 죽기 살기로 몰려들었으며 밟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살을 에는 혹한의 연속."

"추위에 못 이겨 얼어죽은 시체가 수없이 밤바다를 울게 했다."

"당시 수송선에서는 모두 다섯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이것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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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광호씨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입니다.

흥남항에서 28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한 빅토리아호.

부산에 가득한 피란민으로 다시 거제도 장승포항에 닻을 내리게 되는 데요.

그를 맞아준 건 생명력이 강한 파아란 보리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13살이었습니다.

(인터뷰5) "난생 처음 군함을 타고 온거죠. 부산에 도착을 했는데 피난민 시설이 잘 안되어있어서 거제도로 회항을 했어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12월 23일 내지 24일 나중에 알고보니까 크리스마스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였었으니까 그 때 장승포에 도착을 한거죠. “

하지만 이제는 68년이라는 세월 때문에 가족의 얼굴 조차 기억에서 희미합니다.

달구지를 몰고 함께 일을 하셨던 어머니...

그녀는 헤어진 아들 생각에 목놓아 우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인터뷰6) "그러니까 이제 어머니가 늘 아들 생각을 하면서 울던....그 생각이 자꾸...“

이제 다시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김옥인...

(인터뷰7) 남북이 빨리 왕래가 되고 통일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정말 마음놓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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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살 조성연씨도 잠시일거라 생각했던 피난길에서 결국 가족과 헤어졌습니다.

끔찍했던 전쟁의 참상.

(인터뷰8) 조성연 할머니 "비행기가 기관총으로 막 쏘잖아요. 쏘면서 하얗게 사람이 쓰러져요. 그 구석에서 내가 살아나온 거에요.

당시 혹독한 추위는 끝없는 피난길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동상이 걸린 발을 부여잡고 울었던 자매.

그들은 대구로 이어진 피난길의 끝에서 안락미로 만들어진 죽을 사이좋게 사먹었습니다.

(인터뷰9) 조성연 할머니 "10월 달이니까 다리가 붓고 막 얼었어. 서울에서 하얗게 피난을 나와요. 그래가지고 할 수 없어서 영등포에서 짚차 꼭대기에 타고 대구로 도착했어요. 조그만한 죽을 하나 줘가지고...거기서 밥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안락미 쌀이 이만큼 커요. 그걸 쒀먹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잊혀지지 않아요."

이렇게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KBS 이산가족 찾기에 나선 가족.

전국에서 수만명이 웃고 울었던 그때.

너무나 지난 세월에... 그저 한번 보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이번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68년만에 가족의 생사를 알았지만....

이미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마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여동생은 아쉽게도 올해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랐으면 볼 수 있었을 동생에 대한 미안함.

그녀는 마른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터뷰10) 조성연 할머니 "참 억울하고. 부모형제가 같이 못 살고 떨어져 있다는 게 안 좋은 일이죠.“

그녀와 평생을 살아온 박갑일씨도 아내의 슬픔을 말없이 그렇게 지켜만봐야했습니다.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가 바라는 건. 이산가족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인터뷰11) 박갑일 할아버지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불운하다,,, 그러나 그건 받아줘야 한다. 죽기 전날도 가족에 대한.. 생사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서신, 편지.. 그거라도 왔다갔다. 그거는 해줘야 돼. 이제 남은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매일 수십 명이 죽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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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살의 안승춘 할머니를 수원에서 만났습니다.

전쟁은 그녀에게서 가족 모두를 빼았아 갔습니다.

역병으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전쟁이 시작된 날.

어머니는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를 찾아 정신 없이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억울함에 소리쳐 울었습니다.

(인터뷰12) 안승춘 할머니 "그날 밤에 오빠를 붙들어갖고 갔다고. 그리고 막 대성통곡하고 울어요. 그래서 우리도 자다 일어나서 무슨 일인가하고 울고. 그리고 나서는 영영 오빠 소식 모르죠."

우리 가족은 그때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14살이었던 안승춘 할머니는 11살 동생의 손을...

어머니는 갖난아이였던 동생을 등에 업고 평창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진 폭격에서 정신을 잃었던 안승춘 씨.

안승춘 할머니는 어머니와 작별을 해야만했습니다.

헤어지는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

(인터뷰13) 안승춘 할머니 “폭격을 당했잖아요. 비행기가 막 들이 퍼부으니까 귀가 꽉 먹은 거에요. 그래서 ‘엄마, 엄마’ 소리지르면서 신작로를 막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시체가 하나 둘 보이고. 사람 피하고 눈물하고 녹아서 도랑물을 타더라고요. 엄마는 고기토막같이 나무에 매달렸고요. 시체가... 거기 애기가 매달려서 살았어요”

동생 둘과 함께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장이 된 할머니는 당시를 잊지 못하는데요.

동생까지 하늘나라에 보내야만 했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 어린 소녀가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

“전쟁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잃었다고 말입니다.

(인터뷰14) 안승춘 할머니 "부서진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것만 꺼졌으면 죽었어. 소를 먹다 말고 그렇게 눈물이 시커멓게... 우리 동생하고 나하고 산 거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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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산가족을 만나던 중 역사의 한 페이지와도 마주했습니다.

92살의 윤흥규씨는 전쟁과 함께. 22살의 나이로 군인이 되었는데요.

그는 첫 임무는 바로 순정효황후의 경호였습니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 윤비.

6.25 당시 순정효황후의 이야기는 잘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요.

이 이야기는 실제 1966년 2월 4일 한 언론에 순정효황후와 함께 했던 김명길 상궁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 역사의 한 페이지의 실존 인물입니다.

(인터뷰15) "급한 거야. 인민군이 나오니까. 짚차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 타고 같이 산으로 들어간 거야. 거기서 여러 가지 지시를 받았어. 윤비 마마를 모시고 경호해서 경상도 구포까지 내려가라 이거야. 벌써 다 모실 장소를 정해놨더라고요. 내가 윤비마마를 모시고 일주일간을 거기서 경호한 거예요. 경호하다가 현지 경찰관에게 인계했어. 인계한 후엔 낙동강 전투를 들어가 버렸어. "

이후에도 그는 낙동강 전투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습니다.

가족 모두와 헤어지고 혼자가 되었던 그의 이야기.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30여년 전 첫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을 했다고 하는데요.

90이 넘는 나이가 돼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는 상상 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뷰16)"한 2,3년 있으면 만날 거 아니냐... 2,3년 있으면 만날 걸로 알고 어머니가 내려보낸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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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취재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참여하지 못한 김병호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는데요.

우리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1급 시각장애인인 그는 함께 할 동행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상봉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뷰17) “살아계셨으면 상봉장에서 형님 뵀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엄마, 아빠 눈이 멀어서 이렇게 앞을 못 보니까 내 발로 가지 못하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번에 가서 조카들 만나볼 수 있게 엄마, 아빠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갔다오게 꼭 해주세요. 엄마 아빠.

관련기관들은 뒤늦게 할아버지의 재상봉을 추진하는 등 입장문을 통해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안타깝게도 행사가 몇 일 남지 않은 상황이라 재상봉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인터뷰18) 김병호 할아버지 "하고 싶은 얘기 많죠. 내가 눈만 밝으면 나이 80이라도 차라도 타고 간다고 하지만. 차도 없고 집사람이랑 가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움이 많네요. 앞으로는 우리나라가 이런 일이 절대 없고. 양반들 모두 하시는 일에 고맙고 잘 하시지만. 더 힘을 써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게.. 저희들 차 없고 이런 사람들 차라도 대주셔서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가족과 헤어진지 68년.

제21차 이산가족 상봉만 596대 1의 경쟁률.

과거 선정되지 못한 여러 사례를 보더라도 당첨확률은 로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적십자사는 할아버지의 건강 상황 등을 미리 인지하고서도 동행할 가족여부와 기타 경제적 상황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면하기 힘들어보입니다.

이후 한국시각장애인 연합회 등 시민단체들도 할아버지의 재상봉 등을 촉구하면서 모니터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19)"그 과정에 있어서 본인이 포기할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것이기 때문에 이건 적십자가 다시한번 기회를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하구요 물론 고령화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신체적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많으신데 어르신들이 이분들에 대해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에도 이런 일들이 저는 분명히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대책을 마련해서 다시 이런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많은 시민들도 분개했는데요.

국가적 행사에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시민들의 엄중한 경고.

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식과 윤리가 부족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터뷰20)"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거죠. 케어할사람 하나 붙여서 당연히 경쟁을 뚫고 된 사람을 그런식으로 내쳐버리면 적십자가 할소리가 아닌 것 같아요 반인도적인 일을 서슴없이 그 단체가 할 일이 아니죠 마땅히 해야할 일을 가지고 구질구질한 행정적인 편의주의라든지 안한다든지. 못한다는게 그게 말이 되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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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이번 취재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의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 행사가 국가적인 행사이자 수만명의 간절한 염원이었음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기존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가운데 선정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500명.

이 가운데 대한적십자사는 전화확인을 통해 250명을 추려 대상자의 상봉 희망 여부와 건강상태 등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지만 최종 상봉에 이름을 올린 것 89명에 불과했습니다.

적어도 최종 단계에서만 11명이 제외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정책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이산가족의 쓴소리도 이어졌습니다.

(인터뷰21)"그게 말이죠 지금 예비후보를 만들었으면 그런 예비후보에서 만약에 한두사람이 못간다 하면 바로 예비후보에서 보충해야 하는데 종래의 방식을 그냥 답습해서 그냥 공식적으로 한다는게 이게 무슨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

또한 상봉자들에게 준비사항과 관련한 정보 역시 신속하게 제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안았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지, 자세한 만남일정 역시 제 때 공지되지 않았습니다.

상봉자들은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발만 동동 굴려야 했던 것입니다.

(인터뷰22)"이산가족 노인들 아닙니까? 각자 속초에서 집합했거든. 움직이는게 힘들잖아요 두 번 갈아타고 갈아타고 또 택시타고 이렇게 가야해요 상당히 번거롭죠 한 일주일 이내에 임박해서 편지가 오거든요 그래서 그런 안내에 관계도 사소하지만...."

마지막으로 정작 만나고 싶었던 가족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는데요.

당첨자들은 이번 상봉을 통해 만나고 싶었던 가족의 남겨진 혈육을 통해 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만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마저도 상봉에 당첨되지 못한 90%이상의 이산가족들은 아직도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산가족은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한이자 아픔입니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왔다고는 하나 이산가족들에게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신속하고 과감한 정책으로 남은 이산가족의 전면적 생사확인과 더불어 서신교환이라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상시로 볼 수 있는 상봉장이 마련되기를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이제 별로 없습니다.

지금까지 기획 오인환, 연출에 장주영 저는 소영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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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