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희호 여사, 부부생활에서도 동등한 권리 실천한 참여성운동가

  • 입력 : 2019-06-11 19:17
  • 수정 : 2019-06-12 01:09
◈이희호 여사, 97세를 일기로 별세...한국여성운동사의 큰 별.
◈52년 한국여성문제연구회 발족...2대 회장 역임
◈친족상속법 등 어려운 여성 위한 법제정 노력 기울여
◈부부생활에서도 동등한 권리 실천한 참여성운동가

kfm999 mhz 경기방송 유쾌한 시사

■방송일시: 2019년 6월 11일 (화)
■방송시간: 저녁 6:40 ~
■진 행: 소영선 프로듀서
■출 연: 이성림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 소영선 프로듀서(이하 ‘소’) : 어젯밤, 이희호 여사가 97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하늘에서 국민과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하는데요. 그 내용을 듣고 정말 큰 분이시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내이기에 앞서 1세대 여성운동가였던 이희호 여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이성림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이성림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이하 ‘이’) : 안녕하십니까.

▷ 소 : 오후에 이희호 여사 장례식장에 조문 다녀오셨다면서요?

▶ 이 : 네 그랬습니다. 2시부터 문상을 받는다고 하셔서 그 전에 갔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실은 어제 6.15 남북 공동 기념행사가 예정이 돼 있어서 나오실까 여러 가지 염려를 하고 있었는데 밤에 문자가 왔어요. 행사 세미나 기념식이 취소 됐다...그래서 기도와 염려를 하고 있었던 터에 오늘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여야 당파 다 초월해 참석하고 계셨고. 스님, 신부님, 목사님들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분들이 계셨고요. 일반 시민으로 보이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그렇게 한 마음으로 조문하고 또 말씀 나누고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 소 : 오늘 모신 이유는, 이희호 여사가 영부인으로서도 알려져 있지만 그에 앞서 1세대 여성운동가 하셨다라고 하는 부분을 좀 되짚어 보기 위해서인데요. 여성 운동가로서 이희호 여사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 같은 게 있을까요?

▶ 이 : 우선 참 따뜻하신 분이셨고. 제 기억에는 참 똑똑하고 적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따뜻한 면은 그동안 펼쳐 오신 활동을 통해서 짐작해 보실 수 있을 것이고. 적확하다는 부분은 저희 여성연구회가 68년 된 단체이기 때문에 그 60년사 역사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 초대 회장이신 황신덕 박사님은 추계예술대학을 만드시고 중앙 여자 중고등학교, 유치원, 초등학교 이렇게 큰 학원을 운영하신 1세대 여성 운동가시죠. 그런 황신덕 박사님, 이희호 여사님, 박순천 여사님, 모윤숙 선생님 등 이런 분들이 모이셔서 ‘여성이 이러한 상태로 살아선 안 되겠다’ 하면서 당시 남성 가부장 중심이었던 사회에 사는 우리 여성들을 위해서, 일제시대 계몽만 계몽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을 위한 계몽. 그런 것을 위한 수십 차례의 법률 제정을 위한 진정서... 이런 작업을 하실 때 이희호 여사님이 너무 똑똑하고 적확하시니까 문서 작성이나 또 그 취지문 등을 작성하셔서 낭송하신 사진도 여럿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일화라고 하면요. 당시 여성이 유학가기 참 어려운 시절에 여성문제연구회 자료를 보면 ‘도미 환송면 사진’ 이란 사진이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미국 가시는 걸 회원들이 모여서 축하해주는 사진인데. 참 귀한 사진이고요. 그리고 기록에 남지 않은 일화로는, 물론 우리나라 여성가족부도 김대중 대통령 시절 여사님과 상의해서 만든 부서로 알고 있는데. 그 장관 중에 변도윤 장관이라는 분이 이희호 여사님이 여성문제연구회장을 하실 때 미국에서 200불을 보내 주셔 가지고 그 돈으로 그 여성문제연구회 집기도 마련하고 ‘여성 운동의 맥을 절대로 끊지 말고 잘 이어가야 한다’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또 제가 직접 뵌 걸로는, 제가 여사님을 방문할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님의 이름이 적힌 문패가 나란히 붙어있는 걸 보면서 여성운동을 이론만이 아닌 실제로 실천하는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가정에서의 종교 활동도 부부가 종교에 따라 각자 교회와 성당을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 소 : 지금 인터뷰 하고 계신 이성림 회장님은 여성문제연구회장이시잖아요.

▶ 이 : 예. 제가 7대 회장입니다.

▷ 소 : 그런데 이 여성문제 연구회의 전신이라고 하는 여성문제연구소를 창립하신 분이 이희호 여사님인 거죠?

▶ 이 : 이희호 여사님과 여성 법률 사무소를 만드신 이태영 법률 학자님, 여성 정치인 당수를 지내신 박순천 선생님, 교육학자라고 볼 수 있는 황신덕 선생님 등 소위 선각자라고 하는 여성 분들이 중심이 돼서 만드셨고. 초대 회장은 황신덕 박사님이 초대회장을 하셨고. 2대 회장을 이희호 여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 소 : 그런 만큼 여성문제연구소에 많은 애착을 가지신 걸로 알려지고 있는데. 회장님은 이희호 여사님을 가장 마지막으로 뵌 적이 언제셨어요?

▶ 이 : 아무래도 이희호 여사님 행사는 김대중 대통령 행사를 할 때 겹쳐서 늘 초대장을 주셨는데. 저희가 행사 하면 축하 꽃도 보내 주시고 하시는데. 항상 12월이면 김대중 대통령님 노벨 평화상 수상 기념식을 김대중도서관 기념 센터에서 세미나를 하고. 63빌딩에서 기념식을 합니다. 그래서 작년 12월에 마지막으로 뵀었는데 가까이 가서 말씀도 드리고 사진도 같이 찍어 주셨고요. 또 식사도 적당히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도와주시는 분께 ‘댁에서도 이렇게 식사를 잘 하시는가요?’ 하고 여쭈었더니 ‘네 그냥 잘 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제가 역시 여성문제연구회이기 때문에 그러신지 연구소 운영 잘 하라고 말씀을 하셔서 잘 하겠습니다 하고 대화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 소 : 연구소 운영 잘 해라 이런 말씀만 하셨어요? 여성운동과 관련해서 이러저러하게 메시지를 주신 것은 없습니까?

▶ 이 : 당시 여러분들이 계시니까 ‘지금 뭐 하는가’ 하고 이렇게 질문은 안 하셨지만. 짧은 순간에 저희들이 고령화 사회 사업 하나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우리 여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돼야 당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력단절 여성 분들을 위한 취업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그거 바람직하다”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 소 :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앞서 나가셨던 분이신 거 같아요. 그 당시에 여성운동을 한다고 하는 자체로 눈총을 받기 쉬웠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가지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셔서 오늘 날 쭉 이어오고 있는 건데. 여성문제연구회라고 하는 게 어떤 목적으로 창립이 된 겁니까?

▶ 이 : 시대적으로 1950년에 전쟁이 나고. 52년 피난 중 부산에서 만나셔서 시작하신 거라고 합니다. 저희가 정식으로 발족을 한 건 1952년 11월인데 기록을 보면 이미 6월부터 얼마나 급하고 절감한 문제였는지 일주일마다 회의를 하신 자료가 지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6월부터 준비를 해서 여성교육 운동가인 황신덕 선생님,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에 당수이신 박순천 선생님,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님, 전 세계를 향해 우리나라를 홍보하고자 했었던 시인모윤숙 여사 등... 이런 분들이 모이셔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가입 제한이 있어서 최소한 대학을 나온 여성들로 출발을 했다가 나중에는 일반 여성들로까지 분포를 넓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작할 때 여성문제연구원이라는 걸로 해서 여성의 인권 혹은 법적인 권리 이런 것을 지키는데 앞장서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52년부터 63년까지는 초대회장에 황신덕 박사님이 하셨고 64년부터 71년까지 한 8년 정도를 이희호 여사님께서 회장 직을 맡아 주셨는데. 그때 남녀차별 법조항 철폐에 너무너무 주력을 하셔서 저희 책 나온 목차를 보면, ‘남녀 쌍벌제 통과’, ‘친족상속법, 남녀평등하게 해야 된다’, 또 어려운 여성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해야 된다... 또 요즘도 우리가 심각하게 느끼는 직업 여성에 대한 실태조사, 외국 기관에 종사하는 여성까지도 조사를 했고. 가정에서 핍박받고 사는 여성 등... 모든 여성을 위한 법제도, 캠페인 이런 것을 이론만 세운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열매를 맺어서 끝내는 중앙부처에 여성부도 발족시키고. 오늘도 가서 뵈니까 여성 장관하셨던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모두 과거의 활동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소 : 많은 것을 해오셨습니다만 듣기로는 ‘혼인신고를 합시다’ 라고 하는 피켓 캠페인 같은 것도 하셨다면서요?

▶ 이 : 예.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교회 활동을 많이 하시면서 요즘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YWCA 대한여자기독청년연합회 총무직도 맡으셔서 ‘혼인신고 합시다’ 캠페인을 하셨는데요.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시절에는 의식이 부족해서 결혼해 놓고도 여성들이 혼인 신고하는 걸 몰라 안 하고 살다 보니까, 남편들이 바람피우면 오히려 본처는 쫓겨나는 문제가 있었죠. 또 ‘축첩 제도 반대’라는 그런 운동도 벌이셨고. 또 이희호 여사님의 캐치프레이즈 문구를 보면 ‘아내를 짓밟는 자가 결국은 나라를 짓밟는다’ 든지. 참 공감이 되는 문구인 거 같습니다.

▷ 소 : ‘첩을 둔 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라’ 도 있었죠.

▶ 이 : 그것도 유명한 일화인데요. 그렇게 당당하게 애써 오신 활동가셨다고 생각됩니다.

▷ 소 : 알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성림 여성문제연구소 회장과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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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