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M 스페셜] "우리는 나라에 의해 감춰진 사람들... - 선감학원 피해자생존자, 그들은 살아있다" / KFM경기방송

  • 입력 : 2018-10-25 18:07
  • 수정 : 2018-10-26 08:21
섬 안에 강제 수용돼 참혹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 현재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보상없이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3부 kfm 스페셜에서는 선감학원 생존 피해자들의 과거와 진실에 대한 이야기 준비했습니다. 취재해온 박상욱 기자 만나봅니다.

■방송일시: 2018년 10월 25일(목)
■방송시간: 3부 저녁 7:00 ~
■진 행: 소영선 프로듀서
■취 재: 박상욱 보도국 기자

20181025(목) kfm스페셜 -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그들은 살아있다

◈ “그 과정에서 연고자가 있거나 가족이 있는 아이들 조차도..”
◈ “주소도 다 알려줬어요. 학교에 알아보면 다 알아볼 수 있잖아요”
◈ “농사일인데 여러 가지가 있어요. 보리 농사도..”
◈ “집에 갈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탈출하는 거. 감히 도망을 못가는 게 도망가다 죽은 애들 가마니로 여러 명 쭉..”

▷ 소영선 프로듀서(이하 ‘소’) : 20여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선감학원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 지고 있습니다. 사회 정화와 교화를 명분으로 부랑아들을 강제로 모아서 운영했던 선감학원, 뭐 하나 떠오르잖아요, 삼청교육대..뭐 이런 느낌인데. 그 생존 피해자들이 이제는 그 아픈 과거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오늘 KFM 스페셜, 박상욱 기자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박상욱 기자(이하‘박’) : 안녕하세요.

▷ 소 : 과거에는 이게 섬이었지만, 현재 선감도가 관광객이 상당히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면서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간척사업을 통해 현재는 여기가 섬이었나 싶고, 특히 펜션 단지도 있어서 과거 그런 아픔이 있던 곳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갖춰져 있는 지역이 됐습니다.

▷ 소 : 거기서 어업도 하시고 그러시나 보죠?

▶ 박 : 네 주민들은 굴이나 바지락 양식 등 주로 어업에 종사하고 있고, 관광객을 위한 체험캠프 등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는데요. 선감학원 자리에는 현재 경기창작센터라는 곳이 들어서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주변에 과거 원생 숙소와 식당으로 사용하던 낡은 건물들도 곳곳에 있는데요. 당시 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 소 : 선감학원은 언제부터 운영돼 온 건가요?

▶ 박 : 선감학원(仙甘學園)은 일제강점기 말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로 세워진 시설입니다. 1942년 4월에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이 수용되면서 시작됐는데요. 이후 1982년 초까지 40년 동안 운영돼 왔다고 합니다.

▷ 소 : 설립초기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이다 보니 어떤 목적이 예상이 되는데 선감학원이 설립된 목적은 뭔가요?

▶ 박 : 불량소년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분이었는데요. 일본은 1924년 10월에 함경남도 영흥에 감화원(感化院)이란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립했습니다. 그 다음은 1938년 10월에 전라남도 목포 고하도(古下島)에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했고, 1942년 안산 선감도에 선감학원이라는 감화원을 설치한 겁니다. 그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이 점차 몰락했고 이들이 도시로 오면서 빈민으로 전락했는데요. 결국 가난한 집 아이들이 거리에서 걸식하는 숫자도 점차 늘어만 갔다고 합니다. 이에 일제는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청소년 수용시설인 감화원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15가구 70여 명만을 남긴 채 주민 400여 명을 강제로 이주시킨 다음 선감학원을 설치한 겁니다.

▷ 소 : 그럼 일제강점기가 끝난 광복 이후에는 폐쇄됐어야 하지 않나요?

▶ 박 : 그렇습니다만, 이 시설은 광복 이후 1946년 2월 경기도로 이관됐습니다. 1954년에는 새로운 건물까지 이어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했고, 1982년까지 존속됐습니다. 박종강 경기창작센터장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1) “그 과정에서 연고자가 있거나 가족이 있는 아이들 조차도 끌려 들어온 거죠. 폐쇄될 때가지 미군이 지원해 주고 위문품 주고... 도에서 감독 순시 오면 기술 가르치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이 시설들이 82년에 폐쇄됐고, 95년도에 경기도직업전문학교로 만들어졌고...”

▶ 박 :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선감학원의 수용 시설도 매우 열악했고, 외부와의 접촉을 할 수 없는 섬 지역이어서 구타와 노동 착취 등 인권을 유린하는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 소 : 선감학원에 수용돼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아이들 아닙니까? 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라고 하는 건데요.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피해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거죠? 이들을 만나봤습니까?

▶ 박 :네. 그렇습니다. 1958년생 한일영씨를 만났습니다. 한씨는 1971년 이맘때 선감학원에 들어가 1974년 그 곳을 탈출했다고 하는데요. 한씨는 경기도 가평에 살았다고 합니다. 14살이던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서울 성북구에 있는 작은집에 혼자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다 경찰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끌려갔고, 곧바로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옮겨졌습니다. 한 씨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2) “주소도 다 알려줬어요. 학교에 알아보면 다 알아볼 수 있잖아요. 그때는 경찰이 워커를 신고 있었는데, 그 발로 차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 소 : 서울에 있는 작은 아버지댁 가던 길에 경찰에 붙잡혔고, 작은 집 주소를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부랑아라고 취급한 거네요?

▶ 박 : 네. 그런 셈인데요. 한 씨는 곧이어 선감학원으로 옮겨집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선감도는 당시 섬이어서 배를 타고 들어야 합니다. 현재 선착장으로 사용하던 곳은 콘크리트로 잘 정비돼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배에서 내려서 뭍까지 걸어 들어가야 하는 형식이었죠.. 당시 한 씨는 집에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집에 데려다 주는 과정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들어보시죠.

(인터뷰3) “한참을 달렸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밤에 마산포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선감도에 들어가는 거에요. 집에 가는 과정 중에 하나다 이렇게만 생각한 거죠.”

▶ 박 : 한 씨는 처음 선감학원에 들어서던 날, 무섭고 끔찍했던 그 날이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 소 : 네 지금까지만 이야기를 들어봐도 언뜻 포로수용소도 아니고 섬에 만들어서 아이들을 부랑아다 하면서 취급했다 하는건데 일단은 학원이란 이름 때문에 그런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육이 있거나 그러긴 했습니까?

▶ 박 : 형식적으로는 교육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노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농사일이 대부분이었고, 당시 선감도에 있었던 염전에서도 일했다고 합니다.

(인터뷰4) “농사일인데 여러 가지가 있어요. 보리 농사도 있고, 염전에서도 노역을 했고, 제일 힘든 게 뽕밭 누에치는 거... 꽁보리밥 그거라도 많이 주면 좋겠는데...”

▶ 박 : 군대식으로 강제 노역을 당했고, 구타, 심지어 고문과 학대 등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부 원생들이 탈출도 시도했는데, 밀물과 거센 조류에 휩쓸려 상당수가 죽기도 했다는 겁니다. 한 씨도 결국 탈출을 시도했고, 다행히 성공해 선감학원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된겁니다.

(인터뷰5) “집에 갈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탈출하는 거. 감히 도망을 못가는 게 도망가다 죽은 애들 가마니로 여러 명 쭉... 일부러 보게 끔. 거기에 공동묘지도 있거든요... 도망가다 죽으면 이렇게 된다...”

▷ 소 : 얼마전에 나왔던 영화죠. 군함도라는게 생각이 나는데요. 진짜로 불과 수 십 년 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네요.

▶ 박 : 그렇습니다. 선감학원 주변 야산에는 현재 공동묘지가 있는데요. 당시 어린 생명들이 갖은 구타와 학대 등에 시달리다 죽어갔고, 이 공동묘지에 비석 하나 없이 매장됐다고 합니다. 당시 선감학원 다니다 졸업하고, 관리자로도 근무했던 김춘근씨를 만났는데요. 김 씨 역시 초등학교 시절 인천에서 갑자기 경찰에 의해 붙잡혀 왔고, 선감학원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김춘근씨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6) “누가 와서 목덜미를 딱 잡더라구요. 집에 가야한다고 울고 그러니까. ‘야 인마 더 좋은데 있어’ 하면서 파출소로 끌고 가더라구요. 가니까 내 또래 애들이 20명 정도 있었어요. 다음 날 배를 타고 여기 선감도로 온 거죠.”

▶ 박 : 교육시설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형식적으로 이뤄졌고 원생들은 대부분 강제 노동에 동원됐다고 합니다. 김 씨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7) “사진관, 목공소, 철공소 여러 가지 다 있었는데 다 형식적이야. 선생들도 많았어요. 근데 뭐 좀 하다 가버리고... 애들 도망가면 잡으러 다니고, 도망가다 죽으면 저 산에 가다 묻고... 내 손으로도 서너명 묻었어요”

▶ 박 : 김 씨는 현재 선감역사박물관에서 일하며 선감학원 동료들을 위한 진실 규명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선감학원은 자급자족이라는 명분으로 어린 원생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이곳에서 탈출하는 걸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비열한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결국 원생들은 구타와 굶주림 때문에 영양실조와 병으로 이어졌고, 굶주림에 많은 어린 원생들이 희생된 겁니다.

▷ 소 : 길가다가 경찰이 그냥 잡아간다 그렇게 해서 선감도에 들어갔다 이게 왜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 안듣는 아이들보면 너 자꾸 그렇게 하면 순사가 와서 잡아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죽음을 무릎쓰고 탈출하려다 비석도 하나 없이 매장돼 있는 원생들을 생각하면, 참담합니다. 감춰져 있던, 그리고 감추려 했던 선감학원에 대한 사실이 지금 관광지로 탈바꿈도 됐고 그랬다면서요. 근데 어떻게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계기가 뭔가요?

▶ 박 : 네. 아이러니한 일인데요. 일제 당시 선감도에서 생활한 일본인의 소설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선감원 부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8살 때 선감도에서 2년간 생활을 했던 이하라 히로미츠 씨가(井原 廣光) 1989년 “아! 선감도(1989년)”라는 소설을 냈습니다. 이하라는 당시 소년들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하고 이 소설을 쓴 건데요. 박종강 경기창작센터장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8) “이하라 히로미츠 이 사람은 매년 센터에 오는데, 일제 강점기에 선감학원 부원장 아들이라 여기서 그 모습을 다 보고... 그 기억을 갖고 ‘아 선감도’ 라는 소설을 쓴 거죠.”

▶ 박 : 이하라는 소설에서 “당시 눈으로 보이는 육지는 불과 3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썰물 때 많은 소년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물살이 빨라 대부분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도 곧 잡혀 왔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한 체벌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폭로한 이하라 씨는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해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했고, 희생당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추모식도 열었다고 합니다.

▷ 소 : 선감학원이 1982년에 폐쇄됐고, 일본인의 소설로 선감학원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더욱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선감학원에 대한 사실, 그 아픈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잖아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사실 선감도 주민들에게도 선감학원의 과거는 감추고 싶은 아픔입니다. 선감학원을 직접 운영한 경기도 역시 만찬가지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작 선감학원 생존 피해자 당사자들도 선감학원에 있었던 일을 입 밖에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이고 선감학원의 진실을 이제는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겁니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장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9) “가난한 어린 아이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니고, 아이들이 신문팔고, 구두 닦으러 다니고 하면 국가로서 너무 창피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안보이는 데다 감춰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섬으로 몰아가지고, 선감학원 속에 넣고 이 아이들에게 무한정으로 강제 노동을 시킨거죠”

▶ 박 : 특히, 경기도가 직접 운영했지만, 어떤 원칙도 없이 불법이 자행된 만큼 책임있는 진상 조사와 규명이 필요하고 지적합니다. 정진각 소장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10) “5년에서 10년까지 중노동을 당하다 보니 이들은 초기 교육 시기를 다 놓칩니다. 이 초기 교육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이들의 인생은 전부 꼬여버립니다. 국가에서는 국가가 번영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길거리 청소를 하다보니까...”

▶ 박 : 문제는 이들 피해자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건데요. 피해 생존자들의 구술에 대부분 의존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 소 : 뭔가 보상을 하려고 해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면.. 구술기록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 아니겠어요? 피해 생존자들의 연세가 이제는 상당히 많아지지 않습니까? 이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 않나 걱정인데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최근 경기도의회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안이 상임위를 통과됐는데요. 경기도가 직접 운영한 기관인 선감학원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책임 있는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들에게 생활안정지원, 의료지원, 심리치료 지원, 쉼터 마련 등을 할 것을 명문화했습니다. 최근 2기 선감학원사건 피해지원 및 위령사업위원회도 출범했구요. “선감학원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국가차원의 조사 및 지원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 소 : 일단은 이런 문제가 생기면 결국은 국가와 경기도에서 운영을 한적이 있으니까요, 경기도에서 이런 선감학원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게 선행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지원도 제대로 이뤄질 같은데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국가나 경기도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입장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마나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를 위한 위령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약간의 지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감학원 인근에서 3년째 선감학원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감학원 사건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돼 버리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당시 피해 원생들이 현재 60대, 70대 어르신들이고 상당수가 전국에 생존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죠. 하지만, 연세가 많고 일부는 병환 중이 있어서 이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 없다는 겁니다. 한 모씨의 말을 들어보시죠.

(인터뷰11) “이제 나이들 있어서 오래 살지도 못할텐데, 그 분들을 위해 하루 이틀이라도 조그만한 행복이라도 갖고 살 수 있도록... 국가에서 예전에 잘못은 했지만, 반성하는 차원에서...”

▶ 박 : 감추고 싶은, 감추려 했던 선감학원은 우리 근현대사에 분명히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겠지만,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있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 소 : 취재 기자가 전해준 선감역사박물관 브로셔에 있는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2017년 선감학원 위령제 중 이야기로 보이는데요. 부랑아는 없어진 것이 아니고, 선감도 섬에 감춰진 것이다! 선감학원을 탈출하려던 아이들은 썰물에 휩쓸려 나갔다가 주검이 되어 밀물에 다시 밀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선감도 땅에라도 묻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말해야 할까? 갯벌은 ‘생명’의 보고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선감학원생에게는 ‘죽음’의 수렁이었다. 오늘 KFM 스페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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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