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을 겪어왔던 서해, 이제는 평화의 바다로

  • 입력 : 2018-07-19 20:36
  • 수정 : 2018-07-25 09:32
연평도 포격 등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 속에 불안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삶.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 불안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생활에도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평화의 봄을 맞이하고 있는 연평도 주민들의 이야기. KFM스페셜에서 살펴봅니다.

■방송일시: 2018년 7월 19일(목)
■방송시간: 3부 저녁 7:00 ~
■진 행: 소영선 프로듀서
■출 연: 신종한 기자, 이유나 아나운서, 하나리 리포터

0719(kfm)

▷소영선 프로듀서(이하 '소') : 지난 4월 판문점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후 부침을 겪어왔던 인천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최북단인 서해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지 않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텐데요. 지금부터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최북단인 서해 5도 현장을 다녀온 신종한 기자와 이유나, 하나리 리포터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종한 기자, 이유나, 하나리 리포터 (이하 ‘신’, ‘이’, ‘하’) : 안녕하세요.

▷소 : 먼저 2010년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부터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은데요.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신: 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당시엔 연평도 진입이 어려워 인천항 인근에서 대기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연평도 포격 사건은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쯤 우리나라 서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사건입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로 추정되는 포탄 백여 발을 발사했는데요. 이 때문에 해병대원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민간인도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소 : 이는 남.북간 휴전협정 이래 일반인을 상대로 한 첫 공격 사례 아닙니까?

▶신: 네 맞습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후 군사 공격은 처음입니다. 때문에 군 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교전규칙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소 :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난 4월27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동안의 남.북정정상회담은 모두 평양에서 열렸던 반면 지난 4월 열렸던 정상회담은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것도 의미가 있었죠.

▶신: 맞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입니다. 정상회담의 3대 핵심 의제로 꼽힌 한반도 비핵화,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남북관계 획기적 개선이 모두 포함됐습니다. 이 후부터 우리나라의 최북단 서해에서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고, 평화지역이 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진 게 사실입니다. 또한 민선 7기 시정 운영에 돌입한 박남춘 인천시장은 취임 전부터 '서해평화협력지대 조성'을 1호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공약 이행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박남춘 인천시장입니다

“남북 정상 간에 판문점 선언이 있었고, 북미 정상회담이 있으면서 인천지역에 평화의 훈풍이 불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항상 연평해전이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불안 속에 사셨던 우리 서해 5도와 어업인들. 이런 분들은 당장 직접적인 수혜의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 보고 그리고 NLL 바다가 평화의 바다가 된다면 아마 우발적이고 국지적인 전쟁의 위험이 줄어 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요."

▷소 : 네, 알겠습니다. 아까부터 인사 이 후에 말씀이 없으셨는데..현장에 직접 다녀온 이유나씨와 하나리씨와도 이제 이야기 좀 나눠보겠습니다. 연평도 등 서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고 오셨다고요?

▶이: 네~지난 6월에 연평도 현장에 2박 3일 동안 직접 다녀왔습니다.

▷소 : 실제로 서해 5도에서 조업활동을 하고 있는 어민 분들은 그 동안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이: 그렇습니다. 이분들에게 서해 5도의 평화는 다름 아닌 생존이었는데요. 최근엔 잦아들었다고 하지만 중국불법어선, 안보로 인한 조업 시간의 제약 등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해 5도 중 하나인 연평도와 역시 최북단 섬 중 하나죠, 교동도에 직접 가서 거주하고 계신 주민들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소 : 8년 전 포격사건이 있던 연평도, 연평도의 현재 분위기는 어떤가요?

▶이: 처음 연평도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어요. 항구에 내리자마자 정박해 있는 어선들과 녹지도 가득했고요. 그런데 섬을 조금 둘러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군데군데 배치된 군사시설들이 많았고. 상주하고 있는 군인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꽂혀있던 빨간 깃발이 있었습니다.

▷소 : 빨간 깃발이라 처음 들어보는데 그게 뭔가요?

▶이: 네, 빨간 깃발은 연평도 포격 당시 포탄이 떨어진 곳인데요. 피해를 입었던 흔적들을 표시 해 놓은 깃발이었습니다. 사람이 뜸한 언덕에도 군사지역에도 심지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한복판 도로 한가운데에도 이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있었습니다.

▷소 : 역시 당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군요. 그러면 8년 전 피해 입은 연평도 내 기반 시설은 이제 복구가 완료됐나요?

▶이: 다행히 지금은 복구가 많이 됐습니다. 집이며 도로들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오히려 한 학생은 예전 연평도만의 특색이 없어진 것 같다며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당시 실제 포격을 당했던 집을 안보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요. 시설은 복구됐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그날이 남아있었습니다. 저희가 안보교육관을 학생들과 같이 돌아봤는데요. 그 이야기 들어보시죠.

“형이랑 학원에 있었는데 공부하던 도중에 문이 쾅 열리는 거예요. (폭탄이 떨어진) 진동 때문에... 저희는 바로 가방 두고 농협 대피소로 갔는데 사람들 모여 있고 문이 잠겨 있는 거예요.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망치 들고 부수고 들어 간 거예요.“

▷소 : 주민들이 잠겨 있던 대피소 문을 망치로 부수고 들어갔다는 말인 거죠?

▶이: 네, 사실 연평도는 분단이 되기 전까지는 전쟁 한 번 없었던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평소 시설을 활용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포격 이후 연평도는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 되버린 거죠. 연평도가 넓지 않거든요. 그래서 실제 학교 지하에 있는 대피소를 둘러봤습니다.

하나리 리포터 : 여기 보면 보일러도 되어있고 수도시설도 다 있고. 지하다 보니 공기청정기, 언제 어떻게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제습기, 소화기. 밖에서 상황을 볼 수 있는 TV가 있고... 화장실도 많다.. 핸드폰 말고 유선전화와 내선 번호해서 비상연락망이랑 전화가..

▷소 : 우리 아이들에게는 당시 상황이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겠어요

▶이: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한 없이 밝은 아이들 이지만 심층 상담을 해 보면 여전히 아이들의 기억 속에 그 날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 들어보시죠. 연평초등학교 박규근 선생님입니다.

“주민들이 무덤덤하게 이겨내고 아이들도 그런 거 같은데 트라우마는 분명히 남아 있어요. 관심을 지속적으로 주셔야 하는데 포격 이후에 관심과 협조가 이뤄지다가 점점 잊혀져가는 거죠. 연평 포격사건 접경 지역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고립 돼 있다는 심리적인 불안함. 물론 밝게 잘 지내요. 깊게 이야기 상담하다보면 그런 게 커요. 특별한 상담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

▶이: 안보의 불안감과 함께 연평도 주민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가장 힘든 점은 바로 고립감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김소영 선생님의 목소리 들어보시죠.

“애들 보시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뛰는 애들이 얼마 없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배가 떠버린 이후에 다치면 나갈 수가 없거든요. 뼈가 부러져도 진통제 먹고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감기가 돌면 약이 꼭 먼저 들어와 있어야 하고...상담실을 만들자고 해서 저와 같은 생각이 많으셔서 예산 받아서 하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여길 들어오려는 분들이 안 계시대요.“

▷소 : 연평도 아이들과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은데.. 아이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이: 바라는 점이라기보다는 8년 전 포격 사건 이후 연평도 아이들은 특별한 시선을 받고 산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는 관심일 수도 있지만 그런 시선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학생1 : 여름방학 때 캠프를 갔을 때 딴 지역 애들을 만나서 연평도 얘기를 하면 신기해해요. 딴세상 얘기를 하는 느낌도 들고요.

학생2 : 포격 나기 전엔 여기가 사람들이 관심도 없었고 연평도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진짜 시골 같은 풍경이었는데 포격이 나니까 사람들한테 굉장히 무서운 곳 굉장히 위험한 곳, 뉴스도 그렇게 나가는데 저희는 잘 살고 있거든요.

▶이: 그들이 사는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인 초접경지역인 만큼 평화모드와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학생3 : 그냥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학생4 : 저는 NLL 지워졌으면 좋겠어요... 북한 땅이 망원경으로 보이긴 해요. 거기로 빨리 갈 수 있으니까.

학생5 : NLL이 없으면 북한이랑 좀 더 친해질 수 있고 인천에도 더 빨리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학생6 : 긴 북한의 도발은 받은 지역이잖아요. 그러니까 북한 도발을 안 받지 않는 지역이었으면 하는 게 1지망이에요.”

▷소 : 아이들의 1지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이 평화모드의 유지가 필요할 텐데요. 최근에는 국가 정책적인 통일과 함께 민간교류를 바탕으로 한 평화 분위기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요? 하나리씨?

▶하: 그렇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교동도인데요. 현재 교동도의 행정구역은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입니다. 하지만 분단 전엔 황해도 연백군 교동도였습니다.

▷소 : 제가 알기론 현재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나요?

▶하: 네 맞습니다. 많이들 계시고요. 얼마나 북한과 가깝냐면 전쟁 전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교동도에서 연백 쪽으로 걸어서 갈만큼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에 사는 사람들이 교동도로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교동도에 살고 있는 주민 이지선씹니다.

“6.25 당시에 황해도 연백에 사시는 분들이 피난으로 교동도 오셨는데 판자촌 꾸려서 사시다가 완전 분단되면서 살던 대로 사시는 거거든요. 시장 쪽 계신 분들은 실향민들이라고 보시면 돼요.”

▶하: 최근 남북 간의 평화 모드가 이어지면서 교동도를 찾는 관광객도 늘었습니다.

특히 지난해 만들어진 교동 안내소 제비집을 통해 주민들이 직접 관광 안내뿐만 아니라 평화의 메신저 역할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승민학생 : “안녕하세요. 여기 교동 안내소 같은 곳이고요. 유래는 교동에 실향민 어르신들을 위해서 제비가 집을 지을 때 북에서 흙을 물어오거든요. 그런 의미를 담아서....”
주민 이지선씨 : “무학리 은행나무라고 해서 무학리라는 마을에 있는 은행나무에요. 북한하고 가까운 마을이라서 북한 쪽에 있는 수나무가 많이 자라면서 꽃가루가 날아와서 이렇게 수정이 된 거거든요. 북한의 수나무와 남한의 암나무가 만나서 열매를 맺었네요. ”

▷소 : 은행나무의 이야기처럼 남한과 북한의 문화가 잘 어우러져 있다는 느낌이 오네요.

▶하: 네, 제비도 연백 쪽에 있는 나무를 물어와 집을 짓는다고 하니까 두 지역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교동도 주민들의 모습에서 평화와 통일로 가는 모범 꼽았습니다. 계속해서 인천발전 연구소 김수한 박사의 얘기 들어보시죠.

“교동의 역사, 문화, 삶을 간략하게 전시하고 있는데. 강화 교동도에 가면 주민이 해설사로서 방문객들에게 설명을 하고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틀을 많이 만들어내고, 시민의 영역에 있는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을 활성화 하는 것.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북한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점과 북한의 강점을 서로 연결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경제 네트워크가 중요할 것 같아요.”

▷소 : 최근 남.북이 평화모드로 들어서면서 연평도 등 서해5도 내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죠?

▶하: 그렇습니다. 서해 5도 중 하나인 연평도의 경우, 물론 학교 차원에서 안보교육이 강화되면서 여전히 한 달에 2~3번 정도 대피훈련을 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평화로 가는 변화를 직접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주민 : “K9 포 훈련도 일 년에 두 세 번씩은 꼭꼭 했거든요.. 북한도 해요. 북한 걔네도 포사격 훈련을 하면 연평도가 쩌렁쩌렁 울려요. 올해는 한 번도 없었어요. 우리 쪽도 북한도.“

어민 : “조업구역에 가서 서북간 조업하다보면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는데 작년만 해도 걔네가 방송해서 발포한다. 빨리 남하라라. 남하 안하면 발포한다. 그랬어요. 올해부터는 그런 게 없어졌죠.“

▷소 : 지난 2010년 연평도 포격 이 후 주민들이 긴장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건데. 최근 남.북 정상 간의 판문점 선언 이 후 분쟁의 지역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변화되는 것을 주민들이 감지하고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신: 맞습니다. 또한 긴장 상태로 지내왔던 서해 5도가 평화모드로 변화되면서 이제는 서해 5도를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위해 정부뿐 아니라 인천시가 주도적으로 나서기로 한 겁니다. 박남춘 인천시장입니다.

“인천 개성 해주를 연결하는 통일경제특구 조성사업 이거를 1호 공약으로 제시를 했고요.. 그렇게 하면서 또 필요한 많은 추진 사업들이 있어요. 중앙 정부가 주도를 하게 됩니다만 인천시 정부도 협업하면서 선제적 대응을 해나간다면. 이런 사업들이 잘 추진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소 : 박남춘 인천시장은 인천을 평화특별시로 만들겠다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통일이 될 경우, 인천이 가장 수혜를 입을 가능성 큰 곳인 만큼 준비하고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신: 그동안 서해 바다는 기후변화와, 해양오염, 남획 등으로 몸살을 앓아왔습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천 시에서는 대규모 바다목장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양식의 한 형태로 출발한 바다목장 사업은 안정된 어족자원 확보와 어민들의 생업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WTO에서 선정한 미래 10대 관광산업 중 하나로 주목되고 있는 크루즈관광산업을 위해 인천항에 내년 4월 크루즈전용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입니다. 인천항만공사 김영국 팀장입니다.

“서울이라든지 수도권은 인천은 아무래도 가까우니까 크루즈를 이용할 가능성이 되게 많거든요. 또 하나는 대만, 중국이라든지 비행기를 타고 크루즈를 타는 플라이앤 크루즈. 이색적인 크루즈 여행 행태가 있어요. 중국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 홍콩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인천항으로 올 수 있도록 할 거고요. 남북 최고의 항만이 인천이니까 저는 크루즈를 타고 북한을 가보고 싶어요. 이런 남북 교류에 교두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고요.”

▶신: 이 밖에도 인천과 개성. 해주를 연결하는 통일경제특구 조성사업 등 인천 시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박남춘 인천시장입니다.

“인천은 바다 항만, 공항을 가진 역동적인 지역이에요 평화 특별시를 넘어서 동북아 시대의 글로벌 허브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땅길은 영종 신도 강화 개성 해주 이런 것을 잇는 서해남북 평화도로를 건설을 통해서 도시 간에 물류 및 내륙 관광이 활성화 도모를 하고 바닷길은 인천 남포 인천 해주 간 항로 개설을 통해서 항만 물류 기반을 조성하고 남북 간에 크루즈도 운항하고 그러면서 해양 관광의 전진도시로 육성해 나가는 문제 마지막으로 백령공항을 건설을 하고 인천 평양 직항로 순환 공항 삼지연 공항, 원산 공항 이런 항로를 개설해서 하늘 길도 이렇게 열어나간다면 아주 인천평화특별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소 : 네, 잘 알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연평도 포격사건 이전에 연평도라든지 서해 5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연평도는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기가 쉬웠는데요. 하지만 오늘 함께 해보니 더 이상 분쟁의 섬도 아닌 평화로운 섬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KFM 스폐셜 '부침을 겪어왔던 서해, 이제는 평화의 바다로'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 모두 수고했습니다.

태그
2024.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