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M스페셜] "첫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녀는 친일파인가 독립운동가인가" / KFM경기방송

  • 입력 : 2018-04-26 20:03
  • 수정 : 2018-04-30 15:21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여성으로 불리는 화가 나혜석, 올해로 타계 70주년을 맞습니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요. 3부 KFM스페셜에서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방송일시: 2018년 4월 26일(목)
■방송시간: 3부 저녁 7:00 ~
■진 행: 소영선 프로듀서
■취 재: 최미근PD

▷ 소: KFM스페셜, 이 시간. 최미근 피디와 함께 합니다.

▶ 최: 안녕하세요. 최미근 피딥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수원시 팔달구 권광로, 여긴 어딜까요?

▷ 소: 오늘 주제와 관련 있는 걸 테죠. 나혜석 거리 아닙니까?

▶ 최: 네, 바로 나혜석 거립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가량의 문화 거립니다. 앞서 프롤로그에서 제가 시민들을 만나 나혜석이 누군지 직접 물어봤는데요.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수원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나혜석,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 소: 올해가 나혜석 타계 70주년이라고요.

▶ 최: 그렇습니다.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시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졌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나혜석 기념홀이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을 찾았습니다. 2층 한편에 마련된 그곳에서 나혜석 선생이 생전에 그린 그림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컷1-나혜석 기념홀 설명 나혜석 선생님의 작품은 년도를 추정해요. 1929년에 그려졌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자화상>의 경우 나혜석 같지 않아요, 얼굴이.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런 것들도 구미 유랑 시에 배웠던 서구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고 보고 있는 거죠. 거칠고 굵은 붓 터치로 그림을 그렸는데, 콧날도 그렇고. 생김새가 서구의 인물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자화상> 작품이에요. (나혜석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두 점이 대표작이긴 해요. 후손들이 보전하셨기 때문에 보전 상태가 깨끗한 상태고, 리움에서 가지고 있는 <화령전 작약> 풍경화를 대표작으로 보고 있어요.

▷ 소: 나혜석 기념홀이 있군요. 잠깐 나왔습니다만, 어떤 작품들이 있나요?

▶ 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는 2015년 개관했는데요. 나혜석 작가의 작품 총 4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나혜석 선생의 후손이 미술관에 직접 기증했는데,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비롯해 미술관측에서 구입한 <나부>와 <염노장>까지 총 4점의 작품을 볼수 있었습니다. 나혜석 기념홀엔 나혜석 선생의 그림 뿐 아니라 생전에 썼던 글까지 전시가 되어 있어서 예술가 나혜석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소: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졌는데, 생각보다 작품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 최: 네 맞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세계 유랑까지 하는 등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지만, 나혜석 선생의 말년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는데요. 김유진 큐레이터를 통해 자세히 들어보시죠.

컷2-김유진 큐레이터 / 나혜석 그녀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 생계 때문에 많이 팔기도 했다고 하고, 집에서도 나혜석의 사회에서 지탄 받는 발언 때문에 버림받는 상황이 되면서 물건을 치워버리게 됐고. 또 머물렀던 절에서 화재가 발생해 그림들이 불타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들이 있어요.

▷ 소: 정월 나혜석 선생하면,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아까 글까지 전시돼 있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작가로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 최: 그렇습니다. 나혜석 선생의 대표작인 ‘이상적 부인’에선 현모양처는 세속적인 모델일 뿐, 결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여성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 뿐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혜석 선생이 당시에 썼던 글들을 보면 “어떻게 그당시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여성 삶을 솔직하게, 또 적나라하게 담아냈는데, 김유진 큐레이터 역시 화가 나혜석 보다 시인 나혜석 활동에 더욱 주목했습니다.

컷3-김유진 큐레이터 / 나혜석 기념홀에 있는 글들은? <여성의 가> 여성의 집이란 나혜석 선생이 발표했던 시입니다. 내용이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아버지의 인형으로서, 여성으로서 벗어나겠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읽어보시면 지금도 와 닿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입니다. (100여 년 전에 쓴 거잖아요? 쉽게 할 수 없는 내용인데?) 시 뿐 아니라 모든 글에서 여성만 죄가 되느냐? 서슴지 않은 발언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도 쉽지 않은 얘기들이에요. 그때 그 시기에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최: 나혜석 선생은 ‘여성이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세상은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일제시대, 여성들이 넘어서야 할 산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 오빠, 남편 등 남성들이 여성을 옥죄는 제도, 구속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나혜석 선생을 ‘조선의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 소: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하기 힘든 발언들을 많이 했네요?

▶ 최: 네, “남자의 여자로 살지 않겠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지금도 쉽지 않은 발언들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나혜석 선생은 글로 세상에 말을 한 겁니다. 최근 미투(#metoo) 운동과 함께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혜석 선생의 그때 당시의 활동과 발언들이 주목되고 있는데요. 이런 글들 말고도, 나혜석 선생이 이혼을 한 후의 삶을 솔직하게 담은 글도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 소: 어떤 글인가요? 내용이?

▶ 최: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한 ‘이혼고백서’와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 이기주의를 고발하는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했습니다. 사실 이 글들은 남성 뿐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지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유진 큐레이터의 말, 들어보시죠.

컷4-김유진 큐레이터 / 예술가로서의 나혜석 (그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죠. 일단 그림의 경우, 여성으로서 세계 일주를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림을 보고 열광했죠. 작품의 소재들이 다각도에서 조명된 서구적인 풍경들을 여성화가가 보여줬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고 보고요. 글이 발표됐을 때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지탄을 받았어요. 그런 얘기들은 하지 마라, 조용히 해라, 이런 어투로 나혜석을 비난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죠.

▷ 소: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라는 말도 있는데 이런경우겠네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발언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앞서 한 시민의 얘기처럼 나혜석 선생이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던 것 같네요?

▶ 최: 맞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혜석은 너무 똑똑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도 하는데요. 이혼을 한 뒤 사회에서 손가락을 받았고, 결국 가족들까지 나혜석 선생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는데요. 그럼에도 나혜석 선생은 끝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그런 용기 있는 활동이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 소: 네. 지금까지 화가로 작가로, 또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펴봤는데요, 최근에 논란이 됐던 부분 한 번 짚어보죠. 독립운동을 했다, 아니다, 친일을 했다. 이거 뭔가요?

▶ 최: 지난 3월 23일이죠. 수원박물관에서 경기도 독립운동가 발굴 조사 사업 결과 보고회가 있었습니다. 경기도에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의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는 사업을 진행했는데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수원이 최종 선정되면서 약 8개월 동안 조사가 진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1차 전수조사 과정에서 나혜석 선생이 포함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 소: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지금 빠진 거 아닌가요? 일부 언론에서 친일을 했다는 얘기도 있고.. 어떻게 된 겁니까?

▶ 최: 나혜석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는지, 안했는지. 사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결론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지난 3월 말에 발표된 지역 독립운동가 최종 명단에선 나혜석 선생의 이름은 빠졌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나혜석 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의 한동민 관장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컷5-한동민 관장(수원화성박물관) / 나혜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근거는? 1919년 3월, 여학당의 학생들을 조직하고 여학당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면서 나혜석은 개성과 평양으로 파견이 되어서 지지자들을 획득하고 독립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결국 잡히면서 5개월 동안 구금됐다가 결국 무죄 석방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고. 1920년 만주 부영사로 부임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가서 1923년도에 우리나라를 경천동지시켰던 폭탄 밀반입 사건이 있었는데. 특히 황옥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영화 <밀정>의 주제이기도 했죠. 그때 의열 단원들의 숙식을 제공해주고, 무기들을 감춰주고, 또 외교 파우치 행랑에 안전하게 국내로 반입될 수 있는 역할을 하면서. 결국은 일제에 의해서 잡혀요. 경찰의 조사를 받죠.

▷ 소: 영화 <밀정>의 황옥 사건 조력자가 나혜석 선생이라는 주장이네요? 이 영화 보긴 했는데, 영화 속 ‘황옥 사건’이 뭐죠?

▶ 최: 1923년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부인 황옥이 의열단 단원과 합심해 일제 주요 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을 중국에서 국내로 반입했다가 발각된 사건을 말하는데요. 영화 속에선 송강호씨가 맡은 역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혜석은 그때 당시 남편과 함께 만주에서 생활했는데요, 그 때 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하는 많은 독립 운동가들에게 거처를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무기를 숨겨주거나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하도록 도왔다는 게 한동민 관장의 설명입니다. 계속해서 들어보시죠.

컷6-한동민 관장(수원화성박물관) / 나혜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근거는? 당대 외무성 관료였던 김우영 조차도 조선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연루됐다는 사실이 일본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불안하고 감춰야 할 것이었죠. 그래서 김우영과 나혜석 관계는 무죄로 덮어버렸던 사실이지만. 의열 단원들은 그 이후에도 <약산 김원봉>을 썼던 민태원이나 의열단에 활동했던 유석현과 김시현은 회고록에 나혜석에 대한 감사함을 여러 군데에서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따라서 의열단과 관련해선 명백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사실인 거죠.

▷ 소: 일단 나혜석을 연구하는 학자 얘기는 나혜석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데요, 그럼 이번에 경기도 독립운동가 발굴 조사 사업에서 제외된 이유는 뭡니까?

▶ 최: 사실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감옥에서 일정 기간 이상의 형량을 살거나, 경찰의 심문을 받는 등 까다로운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이번 조사 사업을 맡았던 수원시정연구원의 유현희 연구원은 나혜석 선생의 독립 활동을 증명해 줄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컷7-유현희 연구원(수원시정연구원) / 나혜석이 명단에서 빠진 까닭은? 수원에서 독립 운동을 하셨다고 이야기 되는 분들을 전수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800여명 정가 수원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추정이 되고 있는데. 그 분들을 대상으로 1차 조사를 진행했어요. 그 과정에서 나혜석 선생도 해당 사항이 됐던 거죠, 구속이 됐었으니까. 1단계로 800여분을 전수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좀 더 독립운동가로서 자료를 추적하면 서훈이 가능할 꺼라고 판단되는 분들을 200여명으로 추리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보다 객관적인 사실들이 증명되는 분, 구속이 되어서 신문에 났다거나, 판결문이 있다거나, 경찰에서 심문을 받았다던가, 이런 자료가 있는 분들을 우선적으로 추리다 보니까 이 과정에서 나혜석 선생은 빠지게 된 거죠.

▷ 소: 자료가 부족했다?

▶ 최: 그렇습니다.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신청하기 위해선 여러 조건들이 필요한데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이 되었다는 당시 경찰의 서류나 신문 기사 등 객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문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몇몇의 글들은 증거가 되지 않는데요. 조사를 진행한 연구원은 나혜석 선생의 경우 이에 적합한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 소: 그런데, 이 와중에 나혜석 선생의 친일 논란도 나오지 않았나요?

▶ 최: 그렇습니다. 정월 나혜석 선생이 경기도 독립운동가 발굴 조사 사업 1차 전수조사 명단에 오르자, 일부 언론에서 그녀가 오히려 친일파라고 보도했습니다. 나혜석 선생에게 드리워진 친일 의혹, 수원화성박물관의 한동민 관장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컷8-한동민 관장(수원화성박물관) / 친일활동을 했다는 의혹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일본어가 됐고. 남편이 만주 부영사로 부임했던 상황 속에서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긴 하겠죠. 그리고 아버지의 경우, 대한제국 때부터 군수를 지내면서 1914년까지 군수를 하니까 일제시대 4년 동안 군수를 한 거죠. 기본적인 친일 조건에 일제시대 군수를 한 사람은 친일로 간주한다는 상황에서는 친일파로 규정되어 있죠. 그리고 오빠 나경석의 경우에도, 만주에서 공장을 경영하면서 일본과 관련된 친일단체에 조선인 대표로 참여하면서 약간의 그런 부분이 친일 요소가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혜석이 아버지, 오빠, 남편이 그렇다고 해서 친일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 같고. 30년 김우영과 이혼한 이후, 죽을 때까지 나혜석이 많은 글을 쓰고 활동을 했지만 친일과 관련한 논설 한 편이 없어요. 친일 단체에 가입한 적도 없고. 그렇기에 친일파로 몰기엔 억울하죠.

▷ 소: 한 마디로 ‘연좌제 친일’인 것 같은데요?

▶ 최: 나혜석 전문가들의 생각 역시 그렇습니다. 나혜석 선생이 죽기 직전까지 썼던 글들을 봤을 때 일본을 찬양한 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나혜석 선생을 친일로 몰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인거죠.

▷ 소: 독립운동 기준엔 못 미치고, 친일 집안에 딸이고. 뭐 이런 것들이 이번 독립운동가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계기가 됐을까요?

▶ 최: 그런 의혹 또한 있다고 하는데요.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나혜석 선생의 친일 의혹과 관련해 수원시정연구원의 유현희 연구원에게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컷9-유현희 연구원(수원시정연구원) / 나혜석 친일이라고 하기엔 부족해 그 부분에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고, 저도 가능하면 나혜석 선생께서 친일보다는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길 바라는 마음은 있어요. 시대를 되돌아 봤을 때 친일보다는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들이 있지만, 지금은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고, 친일 논란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아직까지 친일과 관련한 명확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런 부분 보다는 조금 더 자료가 보강되어야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시간을 갖고 기다려주시면 좋겠고.

▷ 소: 일단은 뭐 독립운동이든 친일이든 판단보류.. 이런 느낌인데요?

▶ 최: 그렇습니다. 나혜석, 그녀가 독립운동가라고 얘기하기에도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고,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내미는 얘기들 역시 명확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한 마디로 독립운동을 했다, 안했다는 부분과 관련해선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 소: 한 마디로 ‘지금은 알 수 없어~’ 이거네요. 근데, 독립운동 적합성을 판단하는 증거의 기준이 엄격한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 최: 저도 그 부분과 관련해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얘기,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저서에 쓰인 글도 증거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관련해서 유현희 연구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컷10-유현희 연구원(수원시정연구원) / 증거 기준이 까다로워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혼란했던 시기, 많은 분들이 빠지고 했던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증거를 대지 않으면 증명하기 어렵거든요. 객관적인 사실에 집착하는 이유는 또 한편으로 친일파가 있었잖아요. 그분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을 누리고, 특권을 누렸던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객관적인 근거 없이 내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을 때, 그것을 쉽게 뒤집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기준은 근거가 명확해야 후대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되는데. 그렇다보니까 엄격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물리적으로 시간이 100년이 가까운 시점이 됐을 때 그분들의 명예만이라도 회복시켜줘야 한다는 점에서는 기준이 조금은 완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드러내 놓고 거침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감시와 표적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즉 일제가 믿게끔 행동하면서 뒤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몰래한 경우는 기록이 없고, 드러난 행동은 기록이 남았을 거 아녜요. 그럼 그런 사람은 독립운동가일까요, 아닐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나혜석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최: 나혜석 타계 70주년을 맞아, 또 최근 미투(#metoo) 운동 붐을 타고 문화예술계에서는 나혜석 선생을 새로 주목하고 있는데요. 나혜석 기념홀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 들어보시죠.

컷11-시민들 / 나혜석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나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서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변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화가인지는 알았는데, 선구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잖아요./살았던 년도가 지금 보다 100년 전이더라고요. 그 당시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용기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고요.

▷ 소: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 운동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인 나혜석 선생이 거론되고, 또 조사되는 과정에서 빗어진 논란까지.. 오늘 잘 살펴봤습니다. 최미근 피디 수고하셨습니다.

▶ 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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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